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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영주 이사장님 우먼세스 인터뷰
작성자 사무국 (ip:)
  • 작성일 2015-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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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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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통’이영주박사 중국이 두렵지 않은가

-우먼센스 인터뷰-

 

명실상부 우리나라 최고의 중국 전문가인 이영주 박사. 그는 한중 교류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54년째 중국을 내집 드나들 듯 오가며 양국의 우호 증진에 앞장서고 있다.

“오랜 시간 돈독한 우정을 쌓은 사람들은 제가 중국에 가면 선물을 보따리로 내줘요. 중국 사람들은 한번 관계가 형성되면 아주 소중히 여기죠. 손해보는 것이 뻔히 눈에 보여도 한두번은 도움을 줄 정도로요. ”

 

‘1세대 중국 전문가’ ‘최고의 중국통’ ‘한중 교류의 구심점’등. 중국 최고의 명문 베이징대 최초의 한국인 박사이자 중국정경문화연구원 이사장인 이영주(75세) 박사를 부르는 수식어는 수없이 많다. 또 중국과 교류하려는 기업체와 정치권, 공공기관 등에서도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손길을 끊임없이 보내 외교통상부 정책자문위원, 새누리당 국제위원회 부우원장 등 수년째 맡고 있는 중책도 수두룩하다. 1999년에는 중국의 유력 일간지인 [경제일보]가 선정한 ‘중국통 5인’에 아시아인으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함께 거론된 인물은 세계적 유력 인사인 EU 수석대표, 주중 러시아 대사 등으로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박사의 중국 내 입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가늠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는 원어민에 가까운 중국어 실력과 54년간 중국을 오가며 체득한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 중국 최고위층까지 아우르는 두터운 인맥을 구축하기까지의 남다른 노력과 중국에 대한 애정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으리라 짐작된다. 중국과 수교조차 맺지 않았던 1960년대, 그가 중국어를 전공하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당시 중국 관련 학과가 국내에 단 세 군데밖에 없었어요. 서울대 중문학과, 성균관대 중문학과,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 이렇게 있었죠. 저는 당시 또래들처럼 경영쪽에 관심이 있어서 성균관대 경제학과에 지원했는데 나중에 아버지께서 입학원서를 중문과로 바꿔 넣으셨어요. 발표 날 경제학과 합격자 명단에 이름이 없어서 떨어진 줄 알고 축 처진 어깨로 집에 들어왔는데 아버지가 ‘탈락 아니다. 합격했다’ 하시면서 중문과에 몰래 원서를 넣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처음 중국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이 박사의 본격적인 중국 공부는 그때 시작되었지만 사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중국과 인연이 깊었다. 19대 할아버지가 고려 후기 충신이자 성리학의 대가인 목은 이색 선생으로, 그는 나라를 대표해 명나라를 오가며 교류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이 박사와 중국의 만남은 어쩌면 오래전부터 정해진 필연과도 같았다.

 

“아버지께서 후손 중에 너라도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받는 게 좋겠다고 하시면서 ‘언젠가 중국이 일어날 닐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어요. 그때만 해도 중국이 문을 꽁꽁 걸어 잠가 ‘죽의 장막’이라 불리던 시대가 막연히 ‘그런 날이 오기나 할까’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되돌아 보면 ‘아버지의 선견지명이 대단하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길잡이가 돼주신 것에도 감사드리고요.”


그렇게 학교에 입학해 다니던 중 성균관대가 대만 국립정치대와 자매결연을 하면서 그는 천금 같은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된다. 서울을 방문한 대만 국립정치대 총장이 과대표로서 의전에 나선 이 박사에게 유학을 권유한 것. 이후 밤마다 대만 가는 꿈을 꿀 정도로 설레던 그는 3학년을 마치자마자 공군 시험을 봐서 입대했고, 만기제대한지 단 4일 만에 여권을 받아 대만으로 떠나게 된다.

 

“정말 꿈꾸던 유학이었는데 막상 가보니 힘들었어요. 교수님 대부분이 사투리를 쓰니까 발음이 다 달라서 수업을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대로 있다간 안 되겠다 싶어 학교에 딸린 부속 초등학교의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 아이들과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아마 15번도 넘게 찾아갔을 거예요. 그렇게 어렵게 허락을 얻어 1년 8개월 동안 초등학교 2-3학년 어린이들과 함께 공부를 했어요. 제 키가 184cm인데 꼬마들과 똑같이 조그마한 의자에 앉아서 공부했죠. 쉽지 않았지만 신념 덕분에 버틸 수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스스로 참 기특하게 여겨져요.”

 

이후 공부를 마치고 국내로 돌아온 그는 특채로 통일부에서 일하며 중국 전문가로서 발걸음을 시작했다. 이후 중국이 산업화를 시작하며 철강 기업인 포스코의 전신 포항제철이 중국에 진출했고, 그는 북경사무소 대표로 일하며 양구의 기술 교류를 앞장서서 돕게 된다. 이후에는 쌍방울의 현지법인 부회장으로 일하기도 하며 국내 기업의 중국 진출에 큰 힘을 보탰다. 당시 그만큼 중국을 잘 아록 중국 문화를 완벽히 이해하는 인물도 없었으니 여러 기업에서 단번에 그에게 중책을 맡긴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대기업의 임원자리에 올랐지만 이 박사는 자기 계발을 멈추지 않았다. 중국 전문가로 활동하며 관심을 키웠던 외교 문제, 즉 국제정치학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1992년 베이징대 박사 과정을 밟기로 한다. 그의 나이 52세 때의 일이다.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일이 문제였죠. 여기저기 출장을 가야 하는데 수업에 빠질 수도 없고, 어려움이 많았어요. 3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그야말로 ‘주경야독’하며 시간을 쪼개 공부했어요. 중국 최고의 대학인 베이징대에서도 권위가 높은 국제정치학과 박사 학위를 얻는 게 호락호락할 리 없잖아요. 스스로의 노력과 교수님 등 주위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학위를 순조롭게 취득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학교에 입학해 다니던 중 성균관대가 대만 국립정치대와 자매결연을 하면서 그는 천금 같은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된다. 서울을 방문한 대만 국립정치대 총장이 과대표로서 의전에 나선 이 박사에게 유학을 권유한 것. 이후 밤마다 대만 가는 꿈을 꿀 정도로 설레던 그는 3학년을 마치자마자 공군 시험을 봐서 입대했고, 만기제대한지 단 4일 만에 여권을 받아 대만으로 떠나게 된다.

 

“정말 꿈꾸던 유학이었는데 막상 가보니 힘들었어요. 교수님 대부분이 사투리를 쓰니까 발음이 다 달라서 수업을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대로 있다간 안 되겠다 싶어 학교에 딸린 부속 초등학교의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 아이들과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아마 15번도 넘게 찾아갔을 거예요. 그렇게 어렵게 허락을 얻어 1년 8개월 동안 초등학교 2-3학년 어린이들과 함께 공부를 했어요. 제 키가 184cm인데 꼬마들과 똑같이 조그마한 의자에 앉아서 공부했죠. 쉽지 않았지만 신념 덕분에 버틸 수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스스로 참 기특하게 여겨져요.”

 

이후 공부를 마치고 국내로 돌아온 그는 특채로 통일부에서 일하며 중국 전문가로서 발걸음을 시작했다. 이후 중국이 산업화를 시작하며 철강 기업인 포스코의 전신 포항제철이 중국에 진출했고, 그는 북경사무소 대표로 일하며 양구의 기술 교류를 앞장서서 돕게 된다. 이후에는 쌍방울의 현지법인 부회장으로 일하기도 하며 국내 기업의 중국 진출에 큰 힘을 보탰다. 당시 그만큼 중국을 잘 아록 중국 문화를 완벽히 이해하는 인물도 없었으니 여러 기업에서 단번에 그에게 중책을 맡긴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대기업의 임원자리에 올랐지만 이 박사는 자기 계발을 멈추지 않았다. 중국 전문가로 활동하며 관심을 키웠던 외교 문제, 즉 국제정치학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1992년 베이징대 박사 과정을 밟기로 한다. 그의 나이 52세 때의 일이다.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일이 문제였죠. 여기저기 출장을 가야 하는데 수업에 빠질 수도 없고, 어려움이 많았어요. 3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그야말로 ‘주경야독’하며 시간을 쪼개 공부했어요. 중국 최고의 대학인 베이징대에서도 권위가 높은 국제정치학과 박사 학위를 얻는 게 호락호락할 리 없잖아요. 스스로의 노력과 교수님 등 주위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학위를 순조롭게 취득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학교에 입학해 다니던 중 성균관대가 대만 국립정치대와 자매결연을 하면서 그는 천금 같은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된다. 서울을 방문한 대만 국립정치대 총장이 과대표로서 의전에 나선 이 박사에게 유학을 권유한 것. 이후 밤마다 대만 가는 꿈을 꿀 정도로 설레던 그는 3학년을 마치자마자 공군 시험을 봐서 입대했고, 만기제대한지 단 4일 만에 여권을 받아 대만으로 떠나게 된다.

 

“정말 꿈꾸던 유학이었는데 막상 가보니 힘들었어요. 교수님 대부분이 사투리를 쓰니까 발음이 다 달라서 수업을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대로 있다간 안 되겠다 싶어 학교에 딸린 부속 초등학교의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 아이들과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아마 15번도 넘게 찾아갔을 거예요. 그렇게 어렵게 허락을 얻어 1년 8개월 동안 초등학교 2-3학년 어린이들과 함께 공부를 했어요. 제 키가 184cm인데 꼬마들과 똑같이 조그마한 의자에 앉아서 공부했죠. 쉽지 않았지만 신념 덕분에 버틸 수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스스로 참 기특하게 여겨져요.”

 

이후 공부를 마치고 국내로 돌아온 그는 특채로 통일부에서 일하며 중국 전문가로서 발걸음을 시작했다. 이후 중국이 산업화를 시작하며 철강 기업인 포스코의 전신 포항제철이 중국에 진출했고, 그는 북경사무소 대표로 일하며 양구의 기술 교류를 앞장서서 돕게 된다. 이후에는 쌍방울의 현지법인 부회장으로 일하기도 하며 국내 기업의 중국 진출에 큰 힘을 보탰다. 당시 그만큼 중국을 잘 아록 중국 문화를 완벽히 이해하는 인물도 없었으니 여러 기업에서 단번에 그에게 중책을 맡긴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대기업의 임원자리에 올랐지만 이 박사는 자기 계발을 멈추지 않았다. 중국 전문가로 활동하며 관심을 키웠던 외교 문제, 즉 국제정치학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1992년 베이징대 박사 과정을 밟기로 한다. 그의 나이 52세 때의 일이다.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일이 문제였죠. 여기저기 출장을 가야 하는데 수업에 빠질 수도 없고, 어려움이 많았어요. 3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그야말로 ‘주경야독’하며 시간을 쪼개 공부했어요. 중국 최고의 대학인 베이징대에서도 권위가 높은 국제정치학과 박사 학위를 얻는 게 호락호락할 리 없잖아요. 스스로의 노력과 교수님 등 주위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학위를 순조롭게 취득할 수 있었어요.”


이 박사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서 진정성이 묻어난다. 한국인이지만 중국도 진심으로 사랑하고 중국을 통해 맺은 인연들을 정말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처음 유항을 갔던 대만, 그리고 중국에서 제가 받았던 호의들을 평생 잊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힘이 닿는 한 어떠한 자리에서는 한중 우호 관계에 기여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앞으로도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열심히 일할 생각입니다. 제가 달릴 수 있는 그날까지 말이죠.”

 

취재 이현경 기자

사진 김승환 -우먼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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